1. 공자의 생애

공자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기원전 100년경에 저술된 <史記>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기원전 551년 부친이 그의 노년에 모친 안씨(이름은 징재)를 맞아 공자를 낳았다. 부친은 숙량흘(叔梁紇), 모친은 안징재(顔徵在)이다. 공자의 이름은 성은 공(孔)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이름이 공구인 이유에 대해서도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니구에서 기도하여 얻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고 하였다는 설이다. 둘째는 공자의 머리모양이 니구산과 비슷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가 된 이유는 집안의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다.

[1]소년 시절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부모를 여의고 고아 신세가 되어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기원전 549년 부친 숙량흘은 공자가 3세 때에 별세하였다. 부친 숙량흘은 시골 무사계급으로 모아 놓은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18살인 모친 안징재는 공자를 대리고 궐리라는 시골마을로 이사하였다. 말년에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나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論語,爲政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이 말에 대해서 중국의 공자인생강의를 집필한 <바오펑산>은 ‘공자 자신이 일생을 학문에 걸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하층민들은 육체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공자도 어머니 안징재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고, 호구지책으로 힘든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소년시설 공자는 노나라 도성인 취푸에서 힘든 생활을 영위하다가 공자가 열일곱 살에 모친 안징재 마저 세상을 떠났다.

[2]청장년 시절

공자는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당시의 풍습대로 3년 상을 마친 뒤 부친 묘소 옆에 모친을 안장하였다. 부친의 재산은 이복 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에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모친상을 마친 공자는 19세에 은나라의 문화를 계승한 송나라로 가서 기관씨의 딸과 혼인하였고,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다.

[3]관료 생활과 교육 활동

공자는 30세에 이르러 관리로서의 지위도 얻었다. 관직은 회계직인 위사(委吏)를 거쳐 목장 관리직인 사직(司直) 등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관직은 요즘으로 해석하면 말단 관직으로 서기 같은 초보적인 교육만을 받으면 수행할 수 있는 직위였다. 따라서 공자가 학문적으로도 많은 진전을 보인 부문에 대해서는 스승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 대부분 독학에 의존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공자는 주(周)의 낙읍(洛邑)을 돌아보고 귀국한 후 그의 명망은 차츰 천하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따라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 수가 훗날 3천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고대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미국 시카고대학 크릴(H.G. Creel)교수는 논어에 이름이 나오는 제자는 22명 뿐 임을 지적하면서 70명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같은 제자의 숫자는 후세 유가에서 공자를 전설화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4]주유천하

크릴(H.G. Creel)은 공자를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야심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자료 : 한국위키피아

공자는 36세 때 소공(昭公) 25년 노나라에 ‘삼환(三桓,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 등 당시 노나라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공자도 그의 뒤를 따라 피난하여 제(齊)나라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 여러 모로 진리를 가르쳤다. 그는 그 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그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다. 하지만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의 적극적인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2년 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에 왕의 측근 배신(陪臣)인 양호(楊虎)가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면서 중도재(中道宰)가 되었고, 52세에는 대사구(大司寇)로 지위가 올랐다. 그 이듬해 노나라의 정공을 따라가 참석한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서 예전에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도록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으며, 난신대부를 축출하는 데 참여하였다. 노나라 삼환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총리급인 대부(大夫)와도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크게 낙담한 공자는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을 버린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태 등 여러 나라를 주유하였다.

[5]생애 후반과 만년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또 노나라에 전해 내려오던 역사서를 다시금 새로 엮어 《춘추》를 편찬했다. 공자의 만년에 얻은 아들 백어가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또 특히 아끼던 제자 안연과 자료마저 잇따라 죽었다. 아들 백어가 사망하자 공자는 어린 손자를 키웠다. 그의 손자인 자사는 이후 조부인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이어 훗날 중용<中庸>을 저술하였다.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 따라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공자는 만년에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論語,爲政篇 :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다. 공자는 72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論語》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후 손자인 자사는 <中庸>을 저술하였으며, 사후 300년 후 <孔子家語>가 저술되었다.

2. 정치사상

공자의 중심 사상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論語)’에 들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仁)에 있다. 공자는 인(仁)에 대해서 제자인 번지가 묻자 공자는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지식에 대해서 묻자 “그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간략히 답변하였다<論語,顔淵篇 :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따라서 공자는 정치사상은 인(仁)의 정치사상으로 집약된다. 공자는 백성들을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서 질서를 잡으면 백성들은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올바르게 된다고 하였다<論語,爲政篇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공자가 교육에 목표로 삼은 것은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층 인사로서 인격의 완성체인 이른바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 당시 군자란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 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공자는 그 지위에 어울리는 도덕적 인격 · 정치적 능력 · 인문적 교양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자신의 교육목표로 삼았다. 공자는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인(仁)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畏敬)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의예지’였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은 하나의 문장으로서 명백히 개념이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도(道),덕(德,) 선(善)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의 도(道)와 덕(德)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인’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학식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난세를 평화적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3. 공자의 사상적 유산

그의 사상은 생시에는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증자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이후 중국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가 되었다. 한국·일본 등 중국의 주변 국가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그 배경에는 중국에 선교목적으로 진출한 선교사들에 의하여 유렵에 알려진 공자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세습귀족정치의 특권계급층을 공격하는데 자주 인용되었다. 그 결과 공자의 철학은 유럽 민주주의 이상의 발전과 프랑스 혁명의 배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프랑스의 시민평등사상을 통하여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크릴, 공자-인간과 신화).

참고문헌
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 통나무, 2011.11
김형찬, 논어, 홍익출판사, 2011.2
바오펑산, 공자인생강의(하병준 역), 시공사, 2011.7
모로하시 데쓰지, 공자·노자·석가(심우성역), 동아시아, 2008.5
신정근, 마흔 논어를 일어야 할 시간, 21세기북스, 2011.9
유필화, 부처에게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 한언, 1997.5
H.G. 크릴, 공자 : 인간과 신화(이성규 역), 지식산업사, 2007.3

에이치앤컨설팅(H&Consulting) 이용균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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